*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5살 '영선'은 의지할 곳이 없다. 양부모 아래 자랐지만, 가세가 기울어 버려진 것. 하지만 '줬다 뺐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던 소녀는 보육원에 가길 거부한다. 테니스에 재능을 보였지만, 지금 형편으론 강습비용은 꿈도 못 꿀 상황.
코치가 제안을 건넨다. 또래 '수아'의 훈련 파트너다. 영선 앞에 꿈꾸던 이상적인 가족이 나타난다. 여기 일부가 되고픈 소녀는 은근한 노력을 시작한다. 갈 곳 없던 참이라 동정심을 자극해 집에 머물고, 가족에게 잘 보이려 애쓴다. 하지만 소박한 꿈은 곧 위기를 맞는다.
야생의 소녀, '어항'에서 '바다'로
▲ ?<캐리어를 끄는 소녀> 스틸
ⓒ 싸이더스
15살 소녀는 철저히 혼자다. 낳아준 부모는 그녀를 버렸고, 운 좋게 입양되었으나 양부모는 압류 딱지 붙은 집만 남기고 사라진다. 재수가 없어도 참 없다. 3자 입장에선 그렇게 넘길 수 있지만, 당사자는 기막힐 노릇이다. 사회복지제도 보호막 덕분에 보육원에 맡겨지지만, 이미 '가족' 품을 경험한 소녀는 그곳으로 가는 선택지는 꿈에도 없다. 처음엔 양부모가 자신을 되찾길 원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 듯하다.
쉼터를 전전하지만, 본인도 계속 버틸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미성년자가 어떻게 해결할 도리가 없다. '천애 고아'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처지. '동아줄'이 무엇이든 절실하다. 그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덥석 잡았다. 그렇게 비좁은 '어항'에서 수아가 사는 '바다'와 만난다. 그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게 그곳에 다 있었다. 모르고 살았더라면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을.
영선에게 제안된 역할은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와 같다. 테니스 선수 출신인 수아의 아빠는 외동딸이 훌륭한 선수가 되길 기대한다. 본업이 바빠 자신이 매일 붙어 있을 순 없으니 그림자처럼 수아의 연습을 도울 파트너가 필요하다. 또래라 적당히 경쟁심도 일으키지만, 어디까지나 딸의 기를 살리고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용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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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등한 '라이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조 역할에 그쳐야 한다. 처음부터 위치는 정해져 있다. 하지만 소녀는 동의한 적이 없다.
나이만 또래일 뿐,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두 소녀
▲ ?<캐리어를 끄는 소녀> 스틸
ⓒ 싸이더스
주변 사람들이 영선의 불우한 처지를 이용하거나 해꼬지하려는 건 아니다. 코치 역시 선의로 아르바이트를 제안한 것이고, 보육원 수녀도 소녀를 내버리지 않으려 뒤쫓는 것이다. 거의 유일한 동갑 친구 '기호' 역시 영선을 동정하며 도우려 애쓴다. 양부모의 친척도 귀찮아하지만, 아예 외면하진 않는다. 수아의 부모 역시 계약 조건은 충실히 이행하리라는 데 의심할 게 없다. 수아 역시 들쑥날쑥하긴 해도 영선을 처음부터 하대하거나 괴롭힐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모든 게 딱 거기까지다. 주변 사람들은 딱 자신이 손해 보지 않을 만큼, 공적인 책임 하에서 행동한다. 누구도 딱히 도덕적으로 지탄받거나 가련한 처지의 소녀를 이용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희생을 감수하며 더 깊게 관여할 생각도 없다. 코치는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주변 시선 때문에 무료 강습을 해줄 수 없고, 보육원은 당사자가 원치 않아도 제도에 따라 그녀를 수용해야 한다. 수아의 부모 역시 딸의 성장을 위한 '재료'로서만 기본에 충실할 따름이다.
15살 주인공은 자신의 흙수저 신세를 인정하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는 걸 익히기엔 아직 이르다. 내가 더 테니스 실력이 뛰어난데, 쟤는 그저 부모 잘 만나 호강하듯 비칠 뿐이다. 여기에서 어떻게든 눌러앉고 싶지만, 언제든 이들이 변심하면 물거품이란 것쯤은 잘 안다. 그래서 나름대로 궁리를 거듭한다. 파트너인 수아와 친해지고 싶다. 잘 지내서 손해 볼 건 아니지 않나. 하지만 수아 역시 영선과는 다른 각도에서 피곤한 삶이란 걸 포착하지 못한 게 실책이다.
차례로 영선은 수아의 아빠와 엄마에게 접근한다. 수아 엄마에겐 자신이 의지할 곳 없다는 가련함을 어필하며 동정을 끌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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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잘 먹히는 듯하지만, 역시 소녀의 상상력으론 상상하지 못한 어른들의 사정이 따로 있었다. 이번엔 자신의 재능과 필요성을 수아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이 또한 다른 가족의 심기를 건드리는 부작용을 예상하지 못했다. 소녀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보지만, 번번이 패착을 맞이한다. 물론 본인 탓은 아니다.
도식적인 설정 속에 10대의 불온한 기운이 분출한다
▲ ?<캐리어를 끄는 소녀> 스틸
ⓒ 싸이더스
동서고금 숱한 사례가 그렇듯 부모 지위와 환경이 너무나 쉽게 자녀의 출발。을 결정한다. 이런 차별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수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은 '수저' 논쟁이 불붙을 만큼 외려 새로운 계급사회로 신분제가 고착된 듯하다. 수아는 아등바등 자신의 집에 눌러앉으려는 영선의 수고를 비웃는다. 그래 봐야 자기가 작정하면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거라고. 친구가 아니라 '하인' 처지를 직시하란 경고다. 우정이 생기리란 기대는 차갑게 식는다.
아빠의 냉혹한 시선은 15살 딸에게 부지불식간에 그림자를 드리운 걸까. 처음엔 기를 펴지 못하는 수아를 도우려던 영선의 감정은 증오로 바뀐다. 마치 비정규직을 깔보며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려는 정규직 노동자의 그것처럼, 아빠에게 종속당한 수아는 그 분풀이와 불안 해소를 영선에게 해댄다. 이건 단순한 횡포가 아니라 두려움의 발로다. 자신이 재능을 인정한 영선이 아빠의 관심을 차지할지 모른다는 원초적 공포는 우정의 가능성을 날리는 데 충분한 이유다.
15살 소녀 앞에 열린 낯선 세상
▲ ?<캐리어를 끄는 소녀> 스틸
ⓒ 싸이더스
그렇게 영선의 노력은 차례로 파국을 맞는다. 어항 속 물고기는 바다를 봐 버렸다. 이건 되돌릴 수 없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테니스에 재능이 없었다면 꿈꾸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꿈도 꿀 수 없다면 대체 나는 왜 태어난 걸까? 영선의 분노는 정당하다. 그러나 누구도 소녀의 울분을 자기 일처럼 함께 울고 방책을 모색해줄 순 없다. 불합리한 세상 앞에서 주인공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체념하고 순응할지, 불을 질러 태워버릴 지로 좁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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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자신의 속내, 아니 위선을 감출 줄 안다. 하지만 15살의 예민한 눈은 쉽게 균열과 틈새를 포착한다. 이걸 이용해 '소 악마'가 되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방도로 활용하려 한다. 하지만 사상누각에 불과할 뿐, 어른들이 나이만 먹은 건 아니기에 방비할 수단도 마련되어 있다. 물론 약간의 피해는 입힐 수 있겠지만, 불합리한 세계의 질서는 쉽게 허물 수 있는 게 아니다. 영선 역시 딴에는 힘껏 모든 수를 다 부려봤지만, 역부족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15살, 어리다면 어리지만 컸다면 큰 나이다. 주인공을 딱 이 나이대로 설정한 건 속세의 무정하고 위험한 풍경과 날것으로 대면하는 충격과 극복을 극대화하기 위함일 테다. 영선 앞에는 몇 가지 길이 놓여 있다. 그 갈래는 지극히 자기 파괴적일 수도,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식물처럼 배경 속 지나치는 엑스트라로 향할 수도 있다. 그 선택을 관객은 안쓰러워할 수도, 동정하며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영선 스스로 결정할 몫이다. 오직 잘 살길 소망할 뿐.
인간관계 중심 드라마인 만큼, 배우 캐릭터 설정과 연기로 형성된 이미지가 핵심인 작업이다. 베테랑 연기자 김태우와 유다인은 그들에게 설정된 캐릭터를 충실히 형상화한다. 봉준호의 <기생충> 속 집주인 부부가 블랙 유머 쏙 빼고 현실 존재라면 취할 법한 모습을 재연한다. 만만찮은 연기 경력의 문승아 배우는 예민함과 결핍, 천진한 잔인함을 겸비한 수아로 활약한다. 주인공 영선 역 최명빈 배우는 최대한 캐릭터에 동화하려 최선을 다한 기색이 역력하다.
독립영화판 <기생충>의 세계는 좀 더 일상적인 부조리의 감각으로 관객을 이끈다. 영선은 이 고립된 바다에서 참치가 될 것인가, 혹은 더 넓은 대양을 가로지르는 고래가 될 수 있을까. 잘 짜인 드라마에 그치기엔 우리가 사는 세상 속 수많은 모순과 적폐,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그릇처럼 다가온 영화다.
<작품정보>
캐리어를 끄는 소녀
Sua's Home
2025 한국 드라마
2026.09.02. 개봉 107분 12세 관람가
감독 윤심경
출연 최명빈, 문승아, 김태훈, 유다인
제작 ㈜어바웃필름
배급 싸이더스
에 열린 낯선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