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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NBC 시트콤 〈모크와 민디〉에서 외계인 '모크'를 연기한 젊은 시절의 로빈 윌리엄스. 이 작품으로 그는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며 스타로 떠올랐다. / 사진=Wikimedia Commons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학생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가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라고 가르쳤던 존 키팅 선생. 〈굿 윌 헌팅〉에서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청년 윌 헌팅(맷 데이먼)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거듭 말하던 심리학자 숀 맥과이어.
두 인물은 배우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 1951~2014)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대표적인 배역이다. 그는 관객을 웃기는 코미디언이면서도 상처와 고독을 지닌 인물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배우였다.
1970년대 후반 텔레비전 시트콤 〈모크와 민디〉로 이름을 알린 뒤 〈굿모닝 베트남〉, 〈죽은 시인의 사회〉, 〈피셔 킹〉, 〈미세스 다웃파이어〉, 〈알라딘〉, 〈패치 아담스〉 등에 출연했다. 1997년 영화 〈굿 윌 헌팅〉으로 미국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을 받았으며, 〈굿모닝 베트남〉과 〈죽은 시인의 사회〉, 〈피셔 킹〉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빠른 말과 즉흥적인 몸짓, 수많은 목소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코미디는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역동적이었다.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서 지니의 목소리를 맡았을 때도 준비된 대사를 넘어선 즉흥연기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생애 마지막 10개월 동안 그의 몸과 정신에는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변화가 빠르게 나타났다.
웃음 뒤에서 겪은 낯선 변화
2013년 10월, 만 62세 무렵부터 윌리엄스에게 변비와 배뇨장애, 속쓰림, 후각 저하, 불면증 등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증상이 이어졌다. 왼손에는 미세한 떨림이 나타났고 움직임은 。차 느려졌다. 이보다 가족을 힘들게 한 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그의 정신적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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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신체 증상에도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꼈고, 편집증과 망상, 공황 증상을 보였다. 여러 병원을 찾아 피검사와 뇌 영상 검사를 받았지만, 뚜렷한 원인은 확인되지 않았다.
아내 수전 슈나이더 윌리엄스(Susan Schneider Williams)는 훗날 미국신경학회 학술지 〈뉴롤로지(Neurology)〉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2016년 9월 발표된 글의 제목은 〈내 남편의 뇌 속에 있는 테러리스트(The Terrorist Inside My Husband's Brain)〉였다. 수전은 예측할 수 없는 증상이 남편의 사고와 감정, 신체 기능을 잇달아 공격하는 모습이 마치 뇌 안에 테러리스트가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윌리엄스는 영화 촬영 중에도 이전에는 경험하지 않았던 어려움을 겪었다. 대사 한 줄을 기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고, 공간을 잘못 판단하거나 사고가 흐려지는 일이 나타났다. 어떤 때에는 비교적 또렷했다가 갑자기 혼란스러워지는 등 상태의 변화도 컸다.
2014년 5월 28일 의료진은 그에게 파킨슨병을 진단했다. 당시에는 표정이 굳고 움직임과 보행 속도가 느려지는 등 파킨슨병에서 흔히 나타나는 운동 증상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알려진 부검 결과를 함께 고려하면, 파킨슨병 진단만으로는 그가 겪던 극심한 불안과 망상, 불면, 급격한 인지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윌리엄스는 정확한 병명을 알지 못한 채 같은 해 8월 11일 미국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2011년 12월 4일 호주 시드니 〈해피 피트 2〉 시사회에 참석한 로빈 위리엄스 / Photo by Eva Rinaldi,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사망 뒤 부검에서 확인된 '미만성 루이소체병'
사망 후 시행한 부검에서 윌리엄스의 뇌 전반에 루이소체 병리가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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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는 부검에서 확인된 병리학적 진단을 '루이소체병', 인지기능 저하와 환시, 파킨슨증 등이 나타나는 임상 질환을 '루이소체치매'로 구분해 쓴다.
부검 보고서에 기록된 병리학적 진단은 미만성 루이소체병(diffuse Lewy body disease)이었다. 이는 루이소체 병리가 뇌간에 국한되지 않고 대뇌피질을 포함한 여러 뇌 영역에 퍼져 있었다는 의미다. 임상적으로는 루이소체치매와 연관되는 병리 소견이다. 수전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가 겪었던 수많은 증상을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병명을 접했다.
생전의 파킨슨병 진단이 전적으로 잘못됐던 것은 아니다. 파킨슨병과 루이소체치매는 모두 신경세포 안에 알파시누클레인(alpha-synuclein)이라는 단백질이 비정상적으로 응집하는 질환군에 속한다. 이 응집체 가운데 하나가 독일의 신경학자 프리드리히 루이의 이름을 딴 '루이소체'다.
임상에서는 파킨슨병이 확립된 뒤 1년이 지나 치매가 발생하면 '파킨슨병 치매', 치매가 파킨슨증보다 먼저 또는 파킨슨증이 시작된 뒤 1년 이내에 나타나면 '루이소체치매'로 구분한다. 두 질환은 임상 증상과 병리가 상당 부분 겹치며, 국제 진단기준에서는 이러한 '1년 규칙'을 구분에 활용한다.
윌리엄스에게는 운동장애와 함께 인지기능의 기복, 불안과 망상, 수면 문제, 자율신경계 증상이 짧은 기간에 뒤섞여 나타났다. 부검 결과를 생전 증상과 함께 보면 단순한 파킨슨병보다는 광범위한 루이소체병의 영향을 받고 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부검에서 루이소체 병리가 확인됐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죽음을 하나의 질환이 초래한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에는 신체질환과 정신건강 상태, 심리·사회적 환경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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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위한 루이소체병 병리가 그가 겪은 극심한 불안과 망상, 인지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를 사망의 단일 원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수전 역시 남편의 죽음을 기존의 우울증만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우울증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의 우울과 불안이 진단되지 않았던 신경퇴행성 질환의 여러 증상 가운데 일부였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기억력 저하보다 먼저 나타날 수 있는 증상
루이소체치매는 알츠하이머병처럼 기억력 저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초기에는 주의력과 각성 수준이 크게 달라지는 인지기능의 기복,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동물을 생생하게 보는 환시, 몸이 굳고 움직임이 느려지는 파킨슨증, 꿈의 내용에 따라 소리를 지르거나 팔다리를 움직이는 렘수면행동장애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2017년 발표된 국제 진단기준은 이 네 가지를 루이소체치매의 핵심 임상 특징으로 제시했다.
변비와 기립저혈압, 배뇨장애, 후각 저하 같은 자율신경계 증상이 인지장애보다 먼저 시작되기도 한다. 우울과 무기력뿐 아니라 극심한 불안, 공황, 망상, 무감동 등의 정신행동증상이 앞서 나타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파킨슨병, 알츠하이머병 등으로 진단되기 쉽다.
윌리엄스에게 나타난 변비와 배뇨장애, 후각 저하, 불면증, 움직임 저하, 극심한 불안과 망상, 인지기능 변화는 사후에 되돌아보면 루이소체병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증상과 일치했다. 윌리엄스에게 이 증상들이 한꺼번에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서로 무관해 보이는 신체·정신 증상으로 흩어져 나타났기 때문에 생전에 하나의 질환으로 묶어내기 어려웠다.
2007년 이라크 라마디의 미군기지에서 열린 USO 위문공연에 참여해 장병들과 인사를 나누는 배우 로빈 윌리엄스 / 사진=U.S. Navy Chad J. McNeeley, Public Domain
생전에는 놓치기 쉬운 루이소체치매
루이소체치매가 전체 치매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조사 대상과 진단 방법에 따라 다르게 보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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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연구에서는 임상적으로 진단된 비율보다 부검에서 루이소체 병리가 확인되는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난다.
이는 상당수 환자가 생전에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 다른 정신질환으로 진단되거나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알츠하이머병 병리와 루이소체 병리가 한 환자에게 함께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증상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
과거에는 루이소체치매가 알츠하이머병 다음으로 흔한 퇴행성 치매라는 설명과 함께 전체 치매의 약 20%를 차지한다는 수치가 널리 인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병률은 임상 진단과 부검 여부, 연구 대상에 따라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하나의 비율로 단정하지 않는 편이 정확하다.
중요한 것은 비율의 순위보다 진단 누락 가능성이다. 기억력 저하만을 중심으로 치매를 판단하면 루이소체치매에서 먼저 나타나는 인지기능의 기복과 파킨슨증, 환시, 수면장애, 자율신경계 증상을 놓칠 수 있다.
향정신성 약물에 민감한 루이소체치매
정확한 진단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약물치료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루이소체치매 환자에게 망상이나 환시, 초조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 일부 향정신성 약물을 사용하면 몸이 심하게 굳거나 의식 수준이 떨어지고, 자율신경계 증상이 악화하는 중증 과민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모든 환자에게 같은 반응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2017년 국제 진단기준은 향정신성 약물에 대한 심한 민감성을 루이소체치매를 뒷받침하는 임상 특징으로 제시했다. 따라서 약물 선택과 투여량 조절, 치료 후 관찰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윌리엄스 역시 불안과 망상 등 여러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 다양한 약물을 처방받았지만, 반응의 기복이 크고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도 경험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그가 겪은 개별 부작용이 특정 약물이나 루이소체병 때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의 사례는 여러 증상이 함께 나타나는 환자에게 약물을 사용할 때 반응을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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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는 루이소체치매 자체를 완치하거나 진행을 멈추게 하는 치료법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인지기능 저하와 파킨슨증, 수면장애, 우울·불안, 자율신경계 이상 등을 증상별로 치료해 생활 기능과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
환자마다 나타나는 증상의 조합과 약물 반응이 크게 달라서 신경과와 정신건강의학과, 재활의학과, 수면의학 등 여러 분야의 협력도 필요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굿 윌 헌팅〉에서 윌리엄스가 연기한 숀은 어린 시절 학대의 상처를 숨기고 살아온 윌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처음에는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하던 윌은 그 말을 여러 번 들은 뒤에야 무너져 울음을 터뜨린다. 로빈 윌리엄스가 남긴 영화 장면 가운데 지금까지도 오래 기억되는 대목이다.
곽용태 신경과 전문의는 디멘시아뉴스 칼럼에서 현실의 윌리엄스 역시 자신의 의지나 성격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뇌질환을 겪고 있었다며, 영화 <굿 윌 헌팅>의 명대사인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이 결국 그 자신에게도 가장 필요한 위로였을 것이라고 썼다.
그가 생전에 정확한 진단을 받았더라도 질환의 진행을 멈출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서로 무관해 보였던 증상에 하나의 의학적 설명이 있다는 사실을 환자와 가족이 알았다면 혼란과 자책을 줄이고 치료와 돌봄의 방향을 정하는 데에는 도움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로빈 윌리엄스의 사례는 기억력 저하가 뚜렷하지 않더라도 인지기능의 심한 기복과 파킨슨증, 환시·망상, 수면장애, 자율신경계 증상이 함께 나타날 때 루이소체치매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밝고 유쾌했던 사람이 갑자기 불안과 공포에 압도되거나 성격과 행동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를 의지나 마음가짐의 문제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신경퇴행성 질환이 감정과 사고, 행동의 변화를 먼저 일으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에게 웃음과 위로를 건넸던 배우의 마지막 시간은 정확한 진단이 질환의 이름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환자와 가족이 겪는 낯선 변화를 이해하도록 돕고, 그 변화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 역시 진료와 돌봄의 중요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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